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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단·소 #1 김은정 단비님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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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단·소 : 기후정의동맹의 단비님을 소개합니다

김은정 단비님을 소개합니다

첫 후원인 인터뷰는 서울기후위기비상행동 대표를 맡고 있는 김은정 단비님입니다. 최근 923기후정의행진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으셨어요. 923이 끝난 뒤 동맹의 단비가 되어주셔서, 현재 가장 따끈따끈(?)한 후원인이시랍니다. /은혜
소개 부탁드려요.
첫 후원인 인터뷰를 열성 후원인이 하셔야 할 텐데 그 영광을 제게 주셔서 감사해요. 현재 서울기후위기비상행동 활동가이면서 동시에 강남기후위기비상행동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지역을 기반으로 한 풀뿌리 기후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릴수 있을것 같네요.
계기가 된 건 19년, 툰베리의 유엔 연설이었어요. 정신이 바짝 들었지요. 기후위기는 이미 깊숙이 와 있는 ‘현재의 위기’이며 모두의 ‘생존 문제’임을 깨닫게 됐어요. ‘환경’ 범주를 넘어선, 만 가지를 규정하는 주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앞뒤 볼 것 없이 강남기후위기비상행동부터 만들게 됐네요.
풀뿌리 기후행동, 어떤 면에서 의미가 있을까요?
지역에서 기후행동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두 가지였던 것 같아요. 첫 번째는, 너무 시급한 사안이었기에 누구에게든, 어디에서든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지역은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공모하는 구체적인 현장이기 때문이었죠. 두 번째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로 인한 위기가 총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기후위기라고 한다면, 그 방향은 거꾸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기후운동이 담론차원을 넘어 손에 잡히는 운동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역이 좀 더 구체적으로 기획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이제 3년이 채 안 된 생각과 이야기니 더 여물어야겠지만요.
비교적 따끈따끈한 기후활동가이시네요. 그 전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19년에만 해도 기후문제를 잘 몰랐으니 따끈따끈한거 같긴하네요^^. 그즈음에는 지역에서 생협운동과 마을 활동을 했어요. 생협운동의 경우 소비자운동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대기업 중심의 생산-소비 구조에 균열을 내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 생협뿐 아니라 노동자협동조합이나 생산자협동조합 등을 보면서 자본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는 경제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마을 활동 역시 정책적으로 시도되었던 것이어서 기존 제도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로인해 많은 주민이 등장했고 지역은 이런 주민들과의 연결로 새로운 역동을 만들어 내는 곳이니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의미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기후위기시대, 명실상부한 주민자치와 이로 인한 풀뿌리 시민권력의 확충은 위에서 말씀드린 지역기획의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고요.
지역운동의 경험을 더 듣고 싶어요.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마을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우정과 의리도 있지만 질투와 시기도 있고, 갈등도 있죠. 그 속에서 어떤 문제에 봉착하면 끊임없는 숙의를 통해 변화를 위한 실천을 만들어 내야 해요. 그 과정이 힘들었지만 제가 성장하기도 했죠. 그러나 여전히 강남은 한계가 많은 동네인 것 같아요. 1인 ‘시위’라는 말은 캠페인으로 순화(?)해야 하고 주민의 권리문제도 정치적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고 전통적인 시민사회도 취약하니까요.
923준비하며 짬짬히 수다 떨며 들려주신 시댁과의 이야기 등이 너무 재밌었어요. ‘원조 페미니스트(?)를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생애 성차별에 대한 첫 투쟁은 9살때였던 것 같아요. 제 아래로 여동생, 남동생이 있거든요. 가만히 보니까 엄마가 밥을 담는데 항상 아빠-남동생-내 밥-여동생 그리고 엄마밥을 가장 나중에 담더라고요. 당연히 이상했죠. 내가 남동생보다 누난데, 왜 나중이며 엄마는 왜 꼴찌로 밥을 담냐고 강력히 항의했더니 어머니는  ’어그래? 미안해‘ 하며 바로 시정해 주셨어요. 밥 푸는 질서가 피나는 투쟁 없이, 쉽게 바뀌어 다소 맥이 풀렸지만. 생에 처음으로 기존 질서를 바꿔낸 경험입니다. (웃음)
피 없는(?) 9살 첫 투쟁 이후의 또 다른 이야기들은 없나요ㅎㅎ
본격적인 페미니스트 운동을 했다기 보다는 개인적 차원의 저항이랄까?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는데, 당시엔 남학생들이 욕하면, 더 세게 욕하는 식으로 응수했어요. 지하철에서도 쩍벌남이 있으면, 살갖 닿는 게 너무 싫어도 굳이 더 심한 쩍벌로 앉고요. 이러다 보니 하루는 후배가 제게 ’김선배는 혹시 잘 때 걸레 물고 자냐?”고 물은 적도 있어요. 입이 험한 내게 에둘러 지적한 거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사실 세련되지 못한 대응이었지만 당시엔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던 거 같아요
결혼해서도 ‘여자’라는 꼬리표는 참 많은 일상의 싸움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결혼하고 첫 식사 자리에서 아버님이 집안의 족보를 건네시며 “네가 우리 집에 시집을 왔으니 이 족보는 네가 관리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저는 아주 해맑고 예의 바르게 ”아버님, 족보는 제가 다 모르시는 분이네요. 그나마 저보다 잘아는 남편이 보관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저희는 시집왔다고 하지 않고 결혼했다고 해요“ 라고 했더니 어안이 벙벙해 하셨던 기억이 있네요. 덕분에 저에 대해 일정 정도 포기하신 남편 부모님은 이후에도 제가 시동생에게 ‘도련님’ 호칭 대신에 이름을 불러도 놀라지 않게 되셨던 것 같아요.^^
기후정의동맹의 가장 최신의, 따끈따끈한 후원인이세요. 923 직후에 후원을 시작해 주신 이유가 있다면?
이유는 바로 너!죠 ^^.
923 이전에는 동맹의 지향이나 활동, 성명이나 구호로 기후정의동맹을 인지했다면, 923 이후 저에게 동맹은 기후정의행진 준비를 통해 구체적인 관계를 맺은 동료들이 활동하는 곳이었죠. 동맹안에 은혜가 있지! 근형이 있지! 정록이 있지! 해미가 있지! 이런 감각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후원하고픈 마음이 들었어요. 활동을 통해 우정을 쌓은 동료들을 떠올리고, 그들이 일하는 곳을 응원하고 후원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니까요. 활동을 하다보면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어요. 저는 그것을 경계하는 편인데 그래서 이번 923조직위 활동에서도 가능한 한 사람 한 사람 잘 들여다보려고 애썼던것 같아요. 덕분에 새로운 연결, 서로의 존재를 감각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었어요.
기후정의동맹에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
운동이 자기효능감에 하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할 텐데, 이를 위해 다양한 영역이나 사람과의 접점을 많이 만들면 좋겠어요. 물론 이것은 동맹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 운동이 협소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운동 전체에 대한 바람이에요. 옳은 말을 하지만 자칫 엘리트주의로 빠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실천적 고민들을 가지고 만날 때 실제 너와 내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들 것 같아요.
전에는 기후정의동맹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셨군요
솔직히 말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기후위기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면 다 틀렸다는 식으로 들리기도 했으니까요. ‘시장주의니까 틀렸어!’ 이렇게 판단하며 걸러내다 보면 운동이 계속 좁아질까 염려도 있어요. 구분하는 것보다는 접점을 통해서 확장하는 운동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지역 운동의 경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계속 만나요. 텀블러를 쓰고, 분리배출을 하는 것들로 효능감을 느끼는 시민들이 8-90%에요. 어떻게 해야 이 시민들이 소비자로 호명되는 것을 거부하고, 기후운동의 주체로 묶어 세울지가 우리의 고민이에요. 그래서 축제, 장터, 학교 등에 찾아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아요. 우리들이 누리는 번영이 어떤 것들을 딛고 이뤄졌는지, 단순히 플라스틱 재활용을 하자는 캠페인이 왜 기업에게는 타격을 주지 못하는지, 왜 탄소중립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삶 전반의 전환이 중요한 지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운동이 커지는 출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923기후정의행진 공집장 제안을 정말 어렵게 수락하셨던 은정님! 구석 구석 꼭 필요한 실무를 든든히 챙기고, 사람을 돌보며 모두가 지친 상황에서도 활짝 웃어주는(혹은 웃긴 이야기를 해주던) 은정님의 다정한 모습이 기억나요. 다정하고 유쾌한 동맹의 단비 은정님,  이야기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