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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N개의기후정의학교 ’고민은 깊어지고 실천과 연대의 근력은 조금 더 생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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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후정의가 아니면 무~엇이 기후정의란 말인가?!’ 매우 도전적이고 정치적인 제목을 보고 나는 곧바로 신청하였다. 아홉 개 강좌 중 개인 사정으로 인해 아쉽게도 2회차(공공교통)과 3회차(공공성과 에너지전환) 두 번을 놓쳤지만 나머지 시간은 충실히 듣고 공부하려고 애를 썼다. “요즘은 누구라도 ‘위기’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 영양가 없는 수다꾼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라고 한 낸시 프레이저의 말에서 ‘위기’는 ‘기후위기’라는 말로 바꾸어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 많은 사람들, 기업, 정부가 기후위기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말’이 무성할수록 나에게는 그 개념(원인, 현상, 영향, 결과 등)이 모호했다. 누가 참말을 하는지 과학자를 포함한 전문가들인지 아니면 정부 관료들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고민 중에 만난 기후정의‘학교’라서 기대가 컸다.
N개의 기후정의학교 첫째 날, 12월 16일로 계획하고 있는 <기후정의선언대회>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였다. 기후위기 문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결고리를 찾아 잇고 힘을 모아 보자는 취지로 이해했다. 이후 모두가 이 선언의 주체로서 기후정의선언문을 써보자고 하였다. 두 달 전이라 벌써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남태평양 키리바시섬에 살고 있는 기후난민의 실질적인 불안정에 대한 이야기, 청소년기후행동이 기후위기를 방관하는 정부를 상대로 헌법 소송을 한 이야기 등 기후위기에 대한 여러가지 불의함, 긴급성, 심각성 등을 말한 것 같다.
그날의 주제 [기후정의x존엄과 평등]은 차별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폈다. 복합차별, 교차차별 등 구조적인 차별에 대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 현상과 차별 의식을 도시 설계나 취약계층 지원, 보건의료 정책 등 정부의 ‘차별’ 정책의 역사에서 찾았다. 그로 인해 개인은 팔자소관이라는 말처럼 무기력이 체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나는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전에 읽었던 『선량한 차별주의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등에서 말하는 개인이 가지는 편견, 악의 평범성 등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구조적 차별에 의한 폭력을 설명하는데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평등이 재난이다’, ‘ 빈민이 아니라 빈곤과 싸우는 나라를 원한다’, ‘체제를 전복하라’ 등 인식의 정의로운 전환과 이를 위한 연대, 실천의 절박함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제4차 10월 5일에는 기후정의동맹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함께 기획한 [기후정의x노동자 건강권]이 주제였다. 조건희 연구원(상임활동가) 발제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우선 원고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이윤보다 노동자의 몸과 삶에 맞춘 노동자들의 요구(부제:기후위기 시대, 더욱 필요한 천천히 일하고 서로 잘 돌보는 사회)>. 아직 투쟁으로 넘어야 할 벽이 높지만, 계산대 앞의 마트노동자에게 잠시라도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가 제공되고 휴일이 보장되는 등 휴식권 쟁취 싸움에 관한 마트노조지회장의 경험담은 고무적이었다. 쿠팡지회장의 폭염대책 투쟁과 하루 파업, 이후 산업안전보건규칙을 준수하라는 준법투쟁, 8월 14일 ‘택배 없는 날’ 불매운동 등 사업주와 쿠팡노동자의 싸움은 매우 처절하고 비장했다. 쿠팡노동의 특성상 조직화가 어려움을 호소하고, 현장의 혹독함으로 인한 동지의 사망사고가 잇따르는 현실을 폭로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이들의 온열질환 대책 등 노동환경 개선은 무척 다급해 보였다. 10월 12일에 있었던 고 장덕주님(구 칠곡센터/현 대구센터 소속)의 추모제에 함께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했다. 개별 노동자만 인정하는 위험상황에서의 작업중지권은 기업(또는 정부)의 개별화 전략 속셈이 의심스럽다. 작업중지권을 노조 단위에서 단협으로 쟁취할 수 있는 제도개선이 당장 필요해 보인다. 기후위기 시대에 노동자 건강권은 ‘멈춤과 늦춤’으로 압축된다. 연사들은 모두 요컨대 건강권 담론을 만들고 더욱 확산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노동자 기후정의는 무엇을 얼마나 왜 만들고, 어떻게 만들건가를 노동자가 정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기후정의는 노동조합만의 요구가 아니라 전 사회적 요구로 확장돼야 한다.
장애여성공감과 함께 열었던 [기후위기x돌봄과 탈시설] 시간은 ‘장애, 소수자 등’에 대한 나의 인식틀을 확장시키는 매우 귀한 시간이었다. 발제 후 소그룹에서 나눈 이야기 또한 너무나 소중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란 어쩌면 장애화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비장애인으로서 사람들을 너무 쉽게 장애/비장애로 나누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우를 범했다. 장애인과 동물의 공통점이 ‘등급’을 매기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접하고 깜짝 놀랐다(‘등급’ 이야기가 강했었기 때문에 이것만 생각난다). 어쨌든, 무의식적이었지만 장애인을 주체로 인정하지 못하고 대상화한 것을 깊이 반성한 시간이었다. 장애를 가진 주체도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비장애인의 입장의 편리성과 효율성에만 매몰되어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려고만 한다. 일반적으로 그런 시설 환경은 좋지 못하여 기후위기의 위험에 몹시 취약하다고 한다. 차별로 인한 인권침해가 우려되는 지점이다. 올해로 노들야학이 문을 연 지 30년이 되었다. 긴 세월동안 우리 사회를 향해 끊이지 않고 외쳐온 투쟁으로 인해 장애인 인권이 조금이라도 향상됐을까?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당연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마저 외면하고 삭제하는 사회는 불의하다. 흔히 오늘날 기후위기를 인간의 오만과 불의의 결과라고 한다. 장애인을 우리 이웃, 친구, 동반자로서 함께 연대하는 것, 정의의 실천이 위기 대응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이상윤 선생의 강좌 [기후정의x건강정의]는 나에게 건강에 대한 개념을 확장시켜주었다. 현재 널리 유통되고 있는, 그러나 엄청나게 왜곡되고 오염된 건강 개념을 지양해야 한다. 이를테면 개인의 불로장생 욕망, 자산으로의 건강, 권력과 통제 장치로써의 건강, 자본 착취와 수탈 대상으로서의 건강 등이다. ‘무병장수’가 불필요하다거나 불의하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건강의 상품화는 안 된다는 것이리라. 비만클리닉, 미인성형외과, 건강보조식품 등 의료산업, 식품산업의 팽창은 개인이 자본주의에 무력하게 포획되는 데 기여한다. 그에 비해 지향해야 할 건강 개념이란 생태계 인간 상호작용으로서의 건강, 사회적 책임이자 연대로서의 건강, 사회적 고통의 체화이자 해방으로의 건강, 사회적 공공재로서의 건강을 일컫는다. 다소 어려운 개념이었지만, 지양해야 할 건강 개념에 대해 석연치 않았던 그간의 혼란함이 정리되는 듯했다. 세상은 당위성만으로 바뀌지 않는다(이상윤 선생의 말). 제6차시는 기후위기 시대에 건강정의의 재정치화를 위한 주체를 발굴하여 드러내는 작업과 그 힘으로 체제 전환을 모색해야 함을 과제로 제시하고, 이를 서로 나누는 것으로 의미 있게 마무리했다.
[기후정의x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 [기후정의x성평등]은 각각 일곱 번째와 마지막 시간의 학습내용이었다. 페미니즘의 흐름 속 내용인 것 같은데, 나에겐 역시 어려운 주제여서 귀에서 맴돌 뿐 의미를 좇기도 벅찼던 기억이었어서 넘기겠다.
내게 아주 흥미로웠던 주제는 주거권 투쟁을 하는 동지들의 이야기다. 이 강의를 듣기 얼마 전 이계수의 『반란의 도시 베를린』을 읽은 터라 더욱 관심이 갔던 주제였다. 2011년부터 서울역 야간폐쇄로 인한 노숙인 퇴출 정책, 반지하 일몰 정책, 홈리스행동 활동가의 노숙인을 위한 투쟁, 민달팽이유니온의 청년주거권 쟁취 투쟁, 백년이 넘는 수명을 가진 튼튼한 건축물을 짓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등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 공동주책의 재건축 수명은 26.95년밖에 안 된다는 것과 그 이면에 개발이익을 노리는 토건 산업이 있다는 것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 분노를 자아냈다. 빈곤사회연대의 반빈곤운동 이야기, 기후위기는 가난이 증폭되어 돌아오는 것임을 실감하며 ‘”내놔라 공공임대, 팔지 마 공공의 땅” 등을 외치며 공유지 확대 운동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연대의 의지를 다짐하기도 했다. 불법 건축물을 임대하는 것이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불가해한 일들이 도처에서 매일, 매순간 넘치게 발생하고, 소멸되는 곳이 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 없다는 이유로 삶이 불안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또한 가슴에 박혔다. ‘도시는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이계수의 말처럼, 이를 좁혀서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라고 달리 말하면 더욱 참말이 되는 것 같다. 민달팽이유니온의 지수는 “전세사기가 가능한 이유는 집을 사고파는 행위로 돈을 버는 것을 국가가 나서서 보증하기 때문”이라며 분노하였다. “미래 사회의 운동 방향은 주거권 쟁취가 될 것 같다”는 한 청중의 말에 모두 동감하며 연대의 결의를 다지는 시간이 됐던 것 같다.
나는 이번 기후정의동맹과 여러 단체가 연대하여 기획한 N개의 기후정의학교를 통해서 기후위기의 근본적인 원인과 현상, 여러 가지 사회 구조의 문제, 체제 전환의 필요성 등을 더욱 실감하였다. 총 아홉 번의 강좌를 기획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 지점을 톺아본 것은 매우 의미가 컸으나, 욕심이 조금 크지 않았나 싶었다. 그것은 내 개인의 문제지만 말이다. 조직력과 소속감의 결여가 학습에 장애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특정 단체 소속 활동가가 아닌 나로서는 매번 낯섦을 이겨내는 워밍업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수많은 복잡한 문제를 알아차리고 대안 내지 체제 전환을 고민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아무튼 이번 기후정의학교를 열심히 참여한 결과, 고민은 더욱 깊어졌지만 그만큼 모든 것이 좀더 선명해져서, 나에게 실천과 연대의 근력이 조금 더 생겼다고 느낀다. 이 기획을 추진한 동지들께 수고하셨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연대의 손을 힘차게 뻗는다.
2023. 11. 12.